뉴스포커스·특집
현대인들의 탈육신 · 탈지역화가 문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알리는 역할 제대로 감당해야
이성춘 선교사(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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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26 [23:4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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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정상회의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한 달 전인 7월 7-8일에 개최되었다. 이 정상회의의 안전유지를 위해서 2만명의 경찰들이 정상회의 현장에 투입되었으며, D-day에는 하루에 겨우 45분밖에 잠을 못자면서 도시의 안전과 질서를 세워갔다.

반세계화와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좌파급진주의자들의 시위대는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다양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들은 “G20는 세계를 착취하는 지배계급이기에 함부르크나 세계 어디에도 필요가 없는 회의”라고 주장했다. 어느 때보다 격렬한 이번 시위는 포퓰리즘과 극우열풍, 자국 이기주의 확산 속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국제사회의 갈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폭력적인 대모를 하면서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어가고자 했다. 아니 G20 정상회의를 지옥의 세상으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지옥화, 이 세상에서 지옥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방화, 폭력이 난무한 곳이 지옥인가? 컨트롤, 통제가 부재한 곳이 지옥인가? 이 세상을 구원받지 못할 곳으로 믿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경건한 독일 기독교인들은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 그 행사와 평화유지를 위해서 기도한다. 함부르크에서 7월 6일의 오전에 카톨릭 학생들 만 명과 개신교 학생 1,500명이 참석하여 평화를 위한 기도, 가난과 피난과 자연파괴를 반대하는 연합기도회를 가졌다.

줄리아 브린크만은 데모 현장에 위치한 예수센터의 창문을 통해서 데모대들이 돌, 화염병들을 경찰을 향해 던지는 것을 보고 교인들과 함께 기도했다. 본에서 왔다는 낯선 부부가 들어와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어, 그들은 30분 동안 데모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기도회를 마치고 창문으로 현장을 보았을 때는 모든 상황들이 종료되어 있었다. 이 센터의 책임자인 홀거 뮈져는“좌파 폭력자들이 데모를 완전하게 준비했고, 생명에 위협적일 수 있었고, 더 많은 어려운 상황들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감사해 했다.

데모현장에 가까이 있는 구세군에서는, 데모대의 신발들이 찢겨지고 벗겨져 맨발이 되었을 때에, 의류보관소에서 신발들을 꺼내어 데모대들에게 신겨주었다. 그들은 폭도와 같은 자들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마틴 루터는 “내 원수가 병이 들면, 그는 이미 나의 원수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원수는 사라지고, 나의 병든 이웃이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상황의 변화를 이야기 한 것이다.

소요가 발생했던 싼첸구역의 거주자인 아드레 크라머는 세계화와 그 반대의 구호 현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일상적인 삶이 방해를 받았고, 그 일로 그는 신경쇠약에 까지 걸리게 되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이곳 주민입니다. 에데카 식품점에 잠시 가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종이 푯말을 들고 동네 슈퍼마켓을 향해 가야 했다.

이 모습이 사진이 찍혀서 SNS에서 백만 번 이상 전달이 되었고, 슈퍼마켓 에데카는 온라인상에서 그에게 대답을 했다. “집에 머물고 계세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배송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온라인상에서는 백만 번 이상 전송은 되었고, 온라인상에서의 에데카의 긴급구호 약속이 있었지만, 그는 그 현장에서 스스로 해결하였다. 그는 뒤 늦은 슈퍼마켓인 에데카의 무상의 전달 서비스를 사양했다. 대신 그는 생필품을 노숙자와 구세군에 후원하도록 제안을 했다. 일주일 후에 에데카 생필품수송차가 성 바울 거리에 있는 교회에 도착해 200파운드 커피, 250리터 우유, 깡통 슈페, 과일을 전달하였다. 에데카는 기회포착, 상황을 극대화하는데 앞선 모습을 보였지만 현장감, 진실성이 없는 일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육을 입으신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인간은 자꾸 몸을 벗어버리는 탈육신, 탈지역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지구촌에 살면서 세계화를 외치면서 저 멀리 있는 세상의 사건에 연대하면서, 내 거주지의 이웃을 너무나 멀리 하고 있다. 내 삶, 일상의 구체적인 사건들과 교감하고 연대하기 보다는 온라인으로 나아가고 추상적인 지식의 사변으로 나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비릴리오는 “지금 우리는 먼 거리에서 보고, 먼 거리에서 들으며 먼 거리에서 행동할 수 있는데, 그것은 탈 지역화와 존재의 근절이라는 과정을 초래한다…. 이제부터 동시대 사람들은 두개의 시계가 필요할 것이다. 즉 하나는 시간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있는 곳을 보는 것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탈지역화를 이루어가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지적해주고 있다.

우리는 멀리도 보아야 하지만, 가까운 곳을 보며, 먼 곳에서만 살지 말고 자기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한다. 세상을 많이 아는데 내가 있는 곳을 전혀 알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갇혀있거나 격리되지 말고 열린 곳으로 나가는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집을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웃으로 들어가야 하고, 아직 믿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과 가까이 만나 어울려야한다. 또한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이웃들과 서로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공동의 실천과 습관들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과 습관들을 다른 사람들의 삶, 특히 가난한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외로운 자들의 삶의 현장인 바깥세상으로 우리를 몰아낸다(마이클 프로스트).”

이 시대는 무한경쟁과 무한소유의 시대가 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책임보다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세상이 되었다. 자기부인과 자기 비움보다는 자기실현과 자기의 극대화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자아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개발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자율성이 아닌 사랑과 순종안에서의 진정한 관계성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레슬리 뉴비긴은 지적한다. 그는 더 나아가 “평등을 구한다고 해서 진정한 정의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의란 각자가 타인에게 사랑과 순종을 베풂으로써 모두가 참 인간이 되도록 하는 이른바 상호 관계성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마이클 프로스트가 권면하는 것처럼 우리는 “일과 놀이와 정치와 사업, 예술, 공동체 봉사, 교육 등의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포”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실현과 자기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그리고 우주적으로 회복되고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내적인 삶, 내세, 가정생활, 교회생활의 주님일 뿐 아니라 지적생활, 정치적 생활 등 모든 영역의 주님이시다(데이비드 길)”

이성춘선교사(독일)
sungchoon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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