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가이슬러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 1’ (#5)

김홍기 목사 | 입력 : 2015/10/03 [14:47]
삼위일체를 효과적으로 논하기 위해서 필히 전제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삼위일체와 관련된 용어들에 관한 정확한 정의인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와 관련된 개념들에 관한 정확한 정의인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와 관련된 논의는 무익한 논란과 부당한 정죄를 끊임없이 양산해 낼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관한 책임 있는 논의는 자신과 상대방의 주장에 담긴 용어들과 개념들을 정확히 정의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경에 기초한 정통 삼위일체론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삼위이시다(God is three persons). 둘째,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fully God).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p. 231). 이 세 가지 명제들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므로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부정하면 정통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셋째 명제를 부정하고 첫째 명제와 둘째 명제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세 분의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tritheism)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물론 이것은 성경과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반면에, 만약 어떤 사람이 첫째 명제와 둘째 명제를 부정하고 셋째 명제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삼위가 구별된 분들(distinct individuals)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이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한 것과 성령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탄원 주시는 사실을 부정하는”(Ibid., p. 240) 양태론(modalism)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물론 이것 역시 성경과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셋째 명제는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삼위이시다”라는 첫째 명제와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둘째 명제만을 취했던 삼신론자는 거의 없었다(Grudem, p. 248). 또한 ‘하나님 안에 분리된 세 존재’(three separate beings in the Godhead)가 있다고 의식적으로 주장하는 삼신론자도 거의 없었다(Geisler, 295). 여기서 ‘being’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고 지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글의 성격상 하단에 註를 다는 대신 이어 씀). 가이슬러는 여기서 ‘존재(being)’라는 용어를 ‘본질(essence, nature)’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이는 고명한 침례교 신학자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 H. Strong)이 삼위의 하나님을 구별할 때 사용했던 ‘존재(subsistence)’라는 용어와 의미상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being(존재)’은 ‘본질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고, ‘subsistence(존재)’는 ‘위격으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이처럼 용어 선택에 세심한 것은 불필요한 오류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가이슬러는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부주의한 언어에 의해 말로(verbally) 삼신론에 빠진다. 또한 “삼위가 구별된다는 사실을 정확히(correctly) 강조하는 것에 의해서 부당하게(wrongly) 분리된(separate-강조는 저자에 의한 것임) 세 존재(being)를 상정하는 삼신론의 언어에 빠져들기 쉽다”(Ibid., p. 295).
 
그러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부주의한 언어에 의해서 말로 삼신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이슬러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글에서 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삼위일체의 한 일원(member)이 세상에서 행동하실 때, 비록 그들이 그(Him)와 더불어 공동 작업을 하더라도, 그(He)는 여전히 다른 두 구성원들(members)과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와 같은 공동 저자들이 같은 책 안에서 같은 생각과 말을 공동 저술하는 것에 의해서 함께 우리의 마음을 어우르고 함께 행동할 때, 우리는 이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다른 두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 작업이 누구나 론을 “노먼,” 혹은 노먼을 “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참으로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구별된(distinct) 사람들이다”(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p. 11). 이와 같은 예증은 경륜적 삼위일체(operational Trinity)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essential being)가 아닌 행동(activities)에 관한 것을 설명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예증의 문제는 앞서 가이슬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삼위가 구별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강조하는 것에 의해서 부당하게 분리된(separate) 세 존재(being)를 상정하는 삼신론의 언어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탁월한 변증학자 가이슬러는 이 문제를 글 하단에 다음과 같은 註를 달아 해결한다. “물론 대부분의 비유처럼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로서 구별된 사람들(distinct persons)일 뿐 아니라 서로 분리된 존재들(we are also separate beings from each other)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적하는 바는 공동 작업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흐릿하게(blur)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능한 신학자 웨인 그루뎀 역시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삼신론적인 견해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적는다. “현대의 집단들 중에 삼신론을 지지하는 집단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연합(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 지도 모른다”(op. cit., p. 248). 그루뎀의 이와 같은 관찰은 삼위일체에 관한 그의 균형 잡힌 견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방교회의 교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루뎀 역시 삼신론자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루뎀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태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위격적인 관계들(personal relationships within the Trinity)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혹은 이것들은 단순히 환상이거나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태론은 예수님이 세(침)례 받으시던 장소에서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내리심을 통하여 계시된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op. cit., p. 242).

여기서 그루뎀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분리된 삼위’라는 용어를 취하여 설명한다. 이는 위트니스 리(이후 WL)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의 계시가 아닌 삼신론적 사고’인 것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 . .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 . .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An Open Letter에 인용됨). 뿐만 아니라, 지방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분리된 삼위’를 말하는 것은 ‘다신론’으로서 ‘삼신론’에 해당되는 것이다(이인규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 실상). 그러면 그루뎀은 과연 삼신론자인가? 물론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unity)”을 언급했을 때 그는 삼위의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인 단일성’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루뎀은 양태론을 비판하며 ‘분리된 삼위’라는 표현을 통해 ‘구별된 삼위’를 강조한 것이다. 그루뎀과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의 구별’과 ‘본질적 단일성’을 동시에 믿는다. 따라서 삼위의 구별을 설명하며 적절한 설명이 없이 ‘세 분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거나, 적절한 설명(예: 가이슬러의 예증과 註)이 없이 세 사람으로 비유하거나, 적절한 설명이 없이 ‘분리된 삼위’로 표현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WL이 “삼신론과 같다”고 비판했고, 지방교회가 “다신론”이라고 정죄했던 소위 “분리된 삼위”의 개념을 WL은 다음처럼 서술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An open letter). 그러면 왜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성경의 계시에 따라 삼위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이 개념을 WL과 지방교회는 ‘분리된 삼위’의 개념이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지방교회는 삼위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상호 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의 표현에 의하면,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다른 두 위격의 임재와 참여가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가지 않으시고 어느 것도 하지 않으신다”(Geisler, p. 5). 따라서 성부가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은, 지방교회의 견해에 의하면, ‘삼신론’인 것이다. 그러나 정통교회는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심을 믿는다. 예를 들어 가이슬러는 “구별된 세 위격은 각각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내재하신다”(Geisler, p. 8)라는 말로 삼위의 ‘본질적 단일성’을 설명한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편재(遍在/in His omnipresence) 안에서 함께 하셨다”(Geisler, p. 5)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지방교회 식 ‘삼위의 상호내재론’으로 볼 때 ‘분리된 삼위’의 개념에 불과하며, 따라서 ‘삼신론과 같은’ 생각, 더 나아가 ‘삼신론’인 것이다. 달라스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Scott Horrell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의 개념, 즉 ‘삼위의 공동 거주(the inner habitation or coinherence of each divine person in the other)’를 신봉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즉 하나님의 각 위는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충만한 위격을 감소시킴이 없이, 상호 내주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적 단일성(essential unity)은 신적 속성의 내적인 동등함과 상호 내주(mutualindwelling)에서 오는 강렬한 개인적 단일성에서 발견된다”(Geisler, p. 8). 이에 대해 가이슬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견해[페리코레시스] 안에서 삼위가 상호 내주하신다는 말은 삼위가 서로이다(three Persons ARE each other)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신다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후자는 양태론적 언어인 것이다”(Geisler, p. 8).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을 믿는 신학자들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결코 ‘삼신론자’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지방교회는 ‘지방교회 식 상호 내재론’의 개념으로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분리된 삼위’를 주장하는 ‘삼신론자들’로 몰아 세운다. 이는 지방교회의 신론은 정통이요 정통교회의 신론은 이단이라는 주장인 것이다(물론 지방교회는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정통교회의 격한 반발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주장은 분명히 이것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가이슬러는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다음과 같은 근거에 의해 ‘양태론’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상호 내주(coinherence)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이 교리가 삼위일체의 한 위를 다른 위로 언급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법적인 것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은 또한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정통이다”(Geisler, p. 8). 이에 대하여 지방교회는 ‘아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은 성령’이시라는 자신들의 주장은 ‘삼위의 상호 내재’뿐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이슬러는 지방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결국 ‘경륜적 양태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한다(이에 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필자: 김홍기 목사, Ph.D., D.Min., 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필자의 ‘신천지 교리 반박 동영상 설교 61편’을 www.21church.com에서 시청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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