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특집
창간 10주년 특집“지난 10년을 돌아보니…”
개미군단이 성장 견인차 / ‘튀는’매력∙‘깜짝’뉴스
서인실 기자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사입력: 2007/05/17 [02:46]  최종편집: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창간배경 - 기억 하나 1997년 5월20일 태어나
 
언론에 돌아와야 합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주변 분들의 얘기에“어림없는 말, 혼신을 바쳐 일한 10년 2개월이면 나도 하나님 앞에 할만큼은 했지”라며 자꾸 안들은 척 했습니다. 아니 안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러다가 요나 꼴이 되는게 아닌가 하는 마음, 짖지 못하는 개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마음과 조금은 두려움도 생겨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시잖아요. 기자하기보다도 더 힘든 것은 재정이었잖아요. 우리를 불러들이시려면 그 표적으로 $10만을 보내주세요...” 그러던 중 편지 한장을 받았습니다.

신문사 챠터등록을 하라며 $3500 체크를 당시 피닉스에서 목회하시던 박기영 목사님과 교우들이 부활절 헌금을 몽땅 보내오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준비된 돈 보다는 모든 것을 주실 하나님을 부여잡기로 하고 편집데스크를 떠난지 3년만인 1997년 4월 30일에 10여분을 모시고 준비기도회를 갖고, 5월 첫주 수요일에 100분의 목회자 앞으로 창간을 알리는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런데 이틀후인 금요일에 편지가 왔습니다. 얼른 뜯어 보니“구독자가 되겠습니다”라는 메모가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내용의 신문이 나올지도 모른체 무조건 믿고 구독하겠다는 분들, 매월 후원을 하겠다는 교회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특정교회, 특정인이 대주주가 되는 것 보다는 신문을 볼줄 아는 독자들이 개미군단을 이루는 신문을 지향했는데 역시 통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 투데이는 1997년 5월20일에 창간되었습니다.
 
신문연역 - 기억 둘 격주간지 2년만에 주간지로

처음에는 격주간지로 시작되었으나, 창간 2주년을 기해 주간지가 되었고 칼라인쇄를 단행, 퍽 돋보였습니다. 기사도 개교회 행사에서 벗어나 미 주류 기독교계 소식과 시사 이슈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특히 차별화된 목회정보, 새로운 트랜드, 그래픽 통계는 독자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또한 미주한인기독언론으로는 최초로 PDF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해외한인교계 소개는 서너발짝씩 앞서갔습니다. 98년의 브라질, 99년의 파라과이, 2000년의 아르헨티나 교계취재는 남미를 북미한인들에게 크게 어필시켰습니다. 당시 3차례에 걸쳐 열린 남미에서의 목회자 세미나, 서울서 열린 4차 세미나도 알차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일본, 체코, 러시아, 중국으로 서인실의 이동데스크는 계속 옮겨다녔고 특히 2005년도에‘프랑크프르트 국제도서전’에 해외기독언론으로서는 본지가 유일하게 공식초청받아 취재, 보도한 것은 큰 보람이었습니다.

‘영적 건강을 중요시 하는 신문’답게 저희는 이단 사이비에 대한 보도가 많았습니다. 엘리야 복음선교원의 미주에서의 활동, 통일교, 이재록, 다락방 등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제기했으며 특히 미주할렐루야기도원, 로버트카얀자집회, 말씀보존학회, 시온복음선교회 등에 기자들이 직접 참석, 보도한바 있으며 발행인은 지역교계 요청에 의한 이단연구세미나를 통해 바른 정보제공과 계몽에도 앞장서왔습니다.

기억나는 고발기사로는“8년째 낮잠자고 있는 사랑의쌀”입니다. 북한주민들에게 쌀을 보내자며 성금을 모아 무려 8년째 은행에 묻어두고 있는 것에 대해 본지가 문제를 제기하자 몇주후에 목적대로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한인교회주소록 - 기억 셋
신뢰를 업데이트

신문발행 외에 본지가 가장 주력한 것이 있다면 단연 한인교회주소록 발간입니다.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처치옐로우페이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신뢰할 만한 리스팅을 위해 매일매일 업데이트하고, 1년에 몇번씩 전화와 이메일, 편지로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은 무척 힘든 일이지만 신문사가 교회를 심방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책자외에도 인터넷(www.koreanchurchyp.com)으로 검색할수 있으며 주소가 찍힌 레이블도 공급은 저희만이 하고 있기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     © 크리스찬투데이
 
 
 
 
 
 
 
 
 
  
기독문화 창달 - 기억 넷
오감으로 느낀다

‘볼거리를 전하는 신문’‘기독문화창달을 하는 신문’을 위해 본지는 교회주보 컨테스트, 기독미술 초대전, 독후감 공모전을 갖기도 했고 신문편집에 있어서도‘읽는 신문’보다는‘보는 신문’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습니다.

첫 캠페인 - 기억 다섯 "보아스가 되어주세요"
 
창간 3개월만에 이름모를 병으로 쓰러진 발행인은 하루가 멀다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고 병상을 지키다 다시 신문사로 돌아와 편집 데스크 앞에 앉는일이 약 1년반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시작된것이 보아스 캠페인입니다. 그만큼 기댈곳을 찾고 싶었고 룻과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시대에 등장하게 된 것처럼 우리 신문이 룻처럼 시대적 언론사명이 있다면 분명 돕는 손길‘보아스’들이 나타날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역시 여기저기서 보아스들이 나타났고 우리 신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로 쓰여져 왔습니다.

특별히 첫 보아스를 소개합니다. “룻이 어디있소? 보아스가 왔는데”라며 사무실로 들어선 이 분은 브라질에서 오신 새소망교회 박재호 목사님이셨습니다. 전혀 처음뵙는 분이었으나 신문에 대해 진심어린 조언과 기도,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또 한 분의‘보아스’를 소개합니다. 육신적인 아픔과 영적 탈진 등으로 도무지 신문발행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즈음, 이 분은 단호히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사명이 남아 있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감리교의 원로 차현회 목사님이셨습니다.

창간 1주년을 앞둔 어느날 인쇄비와 우표값이 없어“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없으니 창피하지만 1년 감사예배만 드리고 문닫자”라며 발행인과 저는 무거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몇일 후 운전하며 다운타운을 지날 즈음 마침 라디오에서 나오는“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찬양을 들으며 핸들을 더 이상 붙잡기 어려우리만큼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긴지 아십니까?
갑자기 구독료가 밀려들어왔습니다. 당시에는 1년에 $50이었는데 $100씩 보내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구독자들을 통해 하나님은‘파란 신호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매년 이런 우여 곡절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한번도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돈 있는 신문사도 힘들어하는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교계 중견 인사에게 본지 발행인은 이렇게 답하셨답니다. “우리는 스피릿으로 합니다”여기에 저는 한가지 더 붙입니다. “저희는 버티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다. 한인교회주소록에 개제될 광고를 받으러 가던 발행인이 운전하던 차가 폐차될 정도로 큰 사고를 당했으나 상처하나 없이 살려주신 하나님은 정말로 대단히 우리 신문사를 꽉 붙잡고 계셨습니다.
 
▲창간 1주년 기념예배. 당시 스탭들이 첫돐 생일케익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

인적 네트워킹 - 기억 여섯
"우리는 언론사역 어깨동무"

오늘의 크리스찬 투데이가 있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도움외에 가장 큰 자산이 있다면 함께 해온 직원들과 필진들입니다. 정규 직원들의 숫자와 수준이 결코 타언론사에 뒤지지 않고, 선별된 필진들이 신문의 품격을 높여왔습니다. 그것외의 자랑은 공식직함을 갖지 않은 스탭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박기영 목사님, 장동섭 목사님, 양현승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그렇습니다. 또한 창간때부터 지금껏 교열을 위해 1주일에 한번씩 출근한 김신웅 장로님 같은 자원봉사자가 계십니다.

또 있습니다. 창간때부터 컴퓨터 조립과 수리, 네트워킹 등을 도와준 중학생 데이빗이 이제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신문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떠난 가족들도 있습니다. 일간지로 옮겨간 기자들도 있고, 지사장으로 일하다 독립한 토론토와 뉴욕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터가 다를뿐 언론사역에서는 늘 어깨동무 친구들입니다.
 
후버스트릿의 기적 - 기억 일곱  문서선교기금 확보를 위한 몸부림

창간 5주년을 지내고 나서는 문서선교기금 확보를 위해 기도하던 중 새로운 프로젝트로 눈을 옮겼습니다. 마침 판매한다는 교회당이 있어서 교회당을 찾는 이에게 소개해주었으나 결국 매매는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는 그 교회당을 구입, 리노베이션을 제대로해서 되팔면 조금은 목돈을 벌겠다 싶어서 덥석 돈을 빌리기 시작했습니다. 3명으로 부터 $20만을 빌려 시작된 이 일은 매각해 단기차액을 얻기는 커녕 말로 다할수 없는 우여곡절을 통해 6필지를 연이어 구입하게 되어 외형적으로는 근 1천만 달러가 창출된 것입니다.

자본금이 무일푼임을 알면서도 돈을 빌려준 이병항 CPA는 수년간 지켜보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평생 돈 계산을 해온 내가 볼때 이 프로젝트는 숫자 계산으로는 망해도 벌써 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건물을 날릴 위기를 극적으로 넘기나 싶으면 그 다음에 반드시 그 옆집을 구입하더군요.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입니다”

지난 5년간 크고 작은 금액의 돈을 돌려주셨던 분들, 은행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 모든 분들은 로뎀나무 밑에 쓰러진 엘리야를 도운 까마귀들이었습니다.
이제 수년내에 이 필지들을 시정부와 함께 노인아파트로 개발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쯤이 되면 우리가 받았던 후원의 몇배를 의미있는 사역에 환원할 것입니다. 선교후원과 차세대 양육외에 특히 열정과 자격을 갖춘 차세대 기독언론인을 키우는 일에는 전폭적인 아주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입니다.
 
미한백상-기념비 기억 여덟  세계선교 실천

본사는 뜻있는 분들과 함께 ‘미한백상’을 제정,  미주이민백년을 기념해 목회 /선교/ 봉사에 헌신한 분들과 교회에 각기 1만달러씩을 지급했습니다.
또한 하와이 마우이섬에 ‘신앙의 기념비 Monument of Christian Faith’를 세워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이 묻거들랑 미주한인성도들이 첫 제단을 쌓은 곳이 여기였다고 말해주고, 오늘날 미주내 3천여 한인교회와 성도들이 묻거들랑 당신들은 100년의 기도 땀방울로 응집된 디아스포라들이라 말해주고,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거들랑 세계선교를 향한 비전과 실천이라고 말해주자”
 
순명장학회 - 기억 아홉  기독언론사역 계승 시발점

미주크리스천신문의 창간발행인이었던 고 김순명 목사의 10주기인 2002년 2월에 추모예배를 드렸고, 5월에는 이단퇴치사역에 힘쓰는 목회자 1인과 기자 1인에게 각각 장학금을 전달하며 선배 기독언론인의 사역을 계승하는 일에 힘을 보태어 왔습니다.
 
칭찬과 꾸중 - 이렇게 십년  신문성장 영양제 역할 톡톡

대체적으로 본지를 향한 칭찬은 ‘편견없는 보도’ ‘깔끔한 편집 ’‘다양한 정보’에 대한 것이 많았으며 ‘지나친 비판’ ‘배달시간 단축요청’ ‘소형교회 취급요청’ 등을 지적받곤 했습니다.
독자들의 편지는 청량제였습니다. “교회 떠나려다 기사를 읽고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기사를 보고 치료방법을 찾았습니다” “목회자극에 감사합니다”  “친척을 찾았습니다” “이단들을 재빨리 정리할수 있도록 정보를 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은 미주교계의 어머니입니다.”
ⓒ 크리스찬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