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성경 읽기(55) - 이스마엘과 같이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김동문 선교사 | 기사입력 2021/07/23 [12:41]

문화로 성경 읽기(55) - 이스마엘과 같이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김동문 선교사 | 입력 : 2021/07/23 [12:41]

▲ 물 가죽부대는 주로 염소 가죽으로 만들곤 한다. 물 가죽부대에 물을 넣어 팔던 물 장수들(the Library of Congress)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아주 익숙하고 당연한 어떤 ’지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실제로는 근거가 부족한 경우라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예를 들어 ‘한 데나리온이 예수시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라는 식의 ‘확신’ 같은 것 말이지요. 노동자의 하루 품삯? 그 시대에 모든 노동자가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고 믿으시나요? 이 품삯은 국가, 도시, 인종, 계층, 계급, 노동의 종류, 강도 등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로마 기준일까요? 로마의 로마 시민 기준일까요? 로마의 로마 시민의 어떤 노동 기준일까요? 로마의 식민지였던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일용직 근로자들이 받았을 급여가 똑같았을까요? 오늘날도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직종, 같은 업무를 해도 그 받는 사례나 급여가 다릅니다. ‘성경에 한 데나리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나오지 않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에 포도원 주인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는 표현이 나올 뿐입니다. 질문 없이 읽는 성경,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일까요?

 

성경 속으로

 

▲ 브엘세바 남쪽 남방 지역 광야는 거친 광야로 알려졌던 곳이다.

 

마른 감정으로, 무덤덤하게 읽는 성경 속 한 인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창 23:8-21)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경우,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굳건한 선입견, 평가와 판단에 이끌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보류하고,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의 처지를 느껴보는, 헤아려보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조금 천천히 이야기에 담겨 있는 그 시대, 그 공간 속으로 다가서면 좋겠습니다.

 

빵 한 조각과 물가죽 부대만 쥐어진 채 브엘세바 광야로 내쫓긴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말입니다. 큰 잔치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된 후의 일입니다. 브엘세바 남쪽 광야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광야,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 맹수의 위협 등이 가득한 곳입니다. 어떤 점에서 먹을 것이 떨어질 것이고 물이 떨어지면 이들의 목숨도 끊어질 것을 아브람도 쫓겨나는 하갈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내몰린,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감정이 억제되고 있었을까요? 그 장면을 보던 사라의 표정은? 어린 이삭의 감정은 또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요?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는 처지로 내몰린 이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맹수의 위협이 넘치는 광야에서 장막은 피난처, 안식처 같은 존재였다.     ©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의 고통스러운 장면이 그려지고 있는데도 우리들은 그들의 감정에 눈길도 마음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버려지고 죽어가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일까요? 약속의 자녀가 아니잖아요? 이삭을 괴롭혔잖아요? 믿음의 조성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동에 문제가 있겠나요?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을 괴롭게 하는 무슬림의 조상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반응을 마땅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요? 이슬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천막도 없이 그들은 밤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맹수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요? 이 광야는 낯설기 그지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알 길도 없습니다. 그 절박한 처지가 다가오는지요?

 

결국 먹고 마실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스마엘은 죽어갑니다. 눈뜨고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하갈은 먼발치에서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얼마다 컸을까요? 죽어가는 이스마엘은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에게 아브람(아브라함)은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아브람의 하나님은 또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저 멀리 보이는 하갈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순간 하갈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요?

 

창세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직접 그 이름을 불러주신, 정해주신 인물이 나옵니다. 그것은 특별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스마엘, 그 이름은 하나님이 하갈에게 미리 알려주신 이름(창 16:11)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을 담아서 말입니다. 또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창 17:20)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다시 생각하기

 

▲ 사진 속 로뎀나무와 싯딤나무. 덤불 그늘이 유일했던 하갈과 이스마엘의 처지는 벼랑끝에 서있다는 것을 그려준다.

 

오늘 이 죽음의 순간이 담긴 현장에도 하나님은 그의 천사를 통해 나타나십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다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물도 찾게 하시고, 이스마엘이 힘을 회복하게 하시고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시기도 했고, 그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처럼 이스마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누구의 하나님이실까요? 이스마엘과 하갈,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에게 잊힌 존재, 죽은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창 21:20)하셨습니다. 혹시 우리 곁의 하갈과 이스마엘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한껏 멀리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는 어떤 이들이 있나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문득 집 나간 아들을 눈에서 떼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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