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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말씀이 희망이다

정성구 박사 | 기사입력 2021/01/19 [12:17]

언약의 말씀이 희망이다

정성구 박사 | 입력 : 2021/01/19 [12:17]

▲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필자가 새해에 칼럼을 구상하고 있을 때, 카톡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 글을 쓰신 분은 기독화가이자, 수필가요, 장로이자, 목사인 황학만 목사이다. 기독화가로서 황학만 화백과 나는 약 56년간 주안에서 함께 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박윤선 목사님이 60년 전에 세운 동산교회의 전도사였고, 그는 고등부 학생이었다. 그는 중앙대 예술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평생을 기독화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독특한 화가로서 외길을 걸어왔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한편의 설교를 듣는듯했다. 그는 칼빈주의적 미술가로서 칼빈주의 C-Story 운동의 멤버로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허락을 받아서 내 칼럼난에 그의 칼럼을 전제하기로 했다.

 

TV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주제와는 아무 관계 없는 대화 한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책을 보던 소녀가 물었습니다.

 

“아저씨, 첩이 뭐예요? 아내 같은 거예요?”

 

“그건 왜 묻니?”

 

“중국 황제는 첩이 천명이었대요.”

 

“지금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서 살지만, 그때는 그런 문화가 황실에 있었어. 왜, 황제가 불쌍하니?”

 

“네~, 엄마 같은 여자를 천명이나 데리고 살아서 불쌍해요.”

 

문득 솔로몬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던 그가, 그 숫자만큼 후궁과 첩을 두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주변국 여인들로서 바로의 딸을 비롯한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녀들이 살던 나라에서 섬기던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렉’ 신들에게 제사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어주었고, 그녀들이 낳은 왕자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는 제사로 감람산에는 요란한 북소리와 검은 연기가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의 등쌀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다투는 아내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고 했을까. 결국에는 나라가 두 쪽이 나더니 성전은 훼파되고 모두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70년이 지나 귀환했던 ‘남 유다’는, 더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대’입니다. 이스라엘 이름이 사라지고, 훼파된 성전에서 ‘언약궤’를 도둑맞은 그곳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땅입니다. 4세기가 지나는 동안 페르시아, 헬라, 로마가 짓밟고 지나간 참담했던 시대가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생각났습니다.

 

유럽의 교회는 이미 중세기 때 고목(枯木)이 되었던 터라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교회라고 하자면 미국과 한국의 교회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어둠의 대륙을 개척해서, 세계선교를 주도하고 부국강병을 과시하던 미국은 솔로몬 때와도 같습니다. 그렇듯 흑암에 싸여있던 조국 땅은 일제의 억압을 지나 민족상쟁으로 초토화되었어도, 폐허를 딛고 굳건히 일어서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선교 국이 되며 국가 경제는 열강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일체치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입니다.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지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 또다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천 개 얼굴을 한 세상을 첩으로 품었던 탓일까? 미국만이 아닙니다. 조국의 십자가첨탑은, 불어 닥친 ‘코로나’바이러스의 삭풍에 무성하던 잎을 떨구며 나목(裸木)이 되어가다니, 아마도 그 현상은 종말의 전조일 겁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부르짖던 긍정의 믿음, 조국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잘되고 잘 살아야 한다는 번영의 복음, 예수의 리더십을 복음인양 전파하던 기업전도, 새해 운수를 점치듯 골라 뽑는 ‘하나님의 말씀 뽑기’ 등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일치운동, 사회복음, 민중신학, 해방신학, 퀴어신학, 여성신학 등, 온갖 신앙양태를 끌어안더니만, 코로나 삭풍이 들이닥칠 줄 몰랐던가? 엄마 같은 여자를 천명이나 품고 살았으니, 황제가 불쌍하다는 소녀의 말이 귓전에 남았던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새해가 될 때마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복음으로 포장해서 선포했습니다. 그렇듯 세상에서 흘러들어온 암묵적 낙관론은 교회에서도 새해의 인사말이 된 지 오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희망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를 배역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어 400년 고난의 세월을 허락하신 이유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께서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이 불의와 죄악이 만연하고 참담한 지경에 이르는 그때 말입니다. 그때까지 더욱 격심해질 고난이 도리어 희망이라는 역설의 복음입니다.

 

폐허에 드러누워 온몸을 긁던 이가 ‘욥’이었다면, 그의 참담한 몰골은 우리의 희망으로써 우리의 표상입니다. 의인이라 찬사받던 욥이 그러한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회개했듯이, 귀로만 듣던 주를 눈으로 뵈올 수 있는 길은, 금이라 해도 제련을 거친 정금(正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된다 해도, 세상 끝날까지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는 변치 않는 언약의 그 말씀.

 

그 말씀을 잊지 않는 한 올해도 희망찬 한 해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새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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