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문화로 성경 읽기(46) - 성경 이야기는 시대 배경과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김동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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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9/29 [14:2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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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읽으면서 장소와 지형을 살펴보는 것은, 그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떠올리는 것을 돕는다(구글, 브엘세바에서 벧엘).

 

드라마나 영화도 시간과 공간(장소)을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진 이야기일지라도, 공상 과학 영화나 드라마조차도 시간과 공간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속 수많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만들어낸 예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그 시간과 공간 배경을 알면, 그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이들은, 너무 자주 자신이 읽고 있는 이야기가 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어느 지역, 어느 나라, 어느 장소를 바탕에 깔고 있는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냥 성경 본문 속 단어 정도로 생각하고 눈으로 읽고 그냥 자나칩니다. 그런 까닭에 동화보다 못한 느낌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잘 알려진 A 목사가 쓴 책과 설교 동영상 B를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도 지금 말씀드린 그런 문제가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그냥 마음에 좋은 느낌 이른바 감동이나 은혜가 된다고 그렇게 읽는 성경이 그렇게 전하는 설교가 마땅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같이 다뤄보면 좋겠습니다. 

 

▲ 모세오경은 화려한 문명을 꽃 피우던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문명 안팎을 무대로 펼쳐진다(이집트 피라미드).

 

성경 속으로

 

“아버지 집이 있는 곳은 브엘세바 였어요. 브엘세바에서 떠나서, 이제는 됐겠지,라고, 야곱이 처음으로 쉬었던 곳이, 어딘지, 성경이 기록하고 있죠. 그곳이 바로, 루스라는 곳이에요. 그 루스가 나중에 벧엘, 벧엘이란 지명을 바뀝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은, 야곱의 심정을 알 수가 있어요. 브엘세바에서 루스, 즉, 벧엘까지의 거리는, 대략 어림잡아서, 80km가, 넘어요. 어떤 문헌에 의하면, 약 90킬로가 넘었다 라고, 되어 있지만, 대략적, 어디를 찍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적으로는 약, 80킬로가 넘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거의 반나절 만에 돌파한 것이에요. 여러분 반나절만에 80킬로를 간 것이에요.”

 

​그 옛날에 비해 오늘날의 도로는 더 곧아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포장 도로를 기준으로 할 때, 가장 곧게 닦인 도로를 바탕으로 해도, 1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입니다. 80킬로미터, 게다가 어떤 문헌에 의하면 약 90킬로미터가 넘었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가 궁금합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은 오늘 이야기 속의 그 길, 브엘세바에서 벧엘을 거쳐서 하란으로 가는 길을 처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도도, 나침반도, 내비게이션도, 길잡이도 없이 그 길을 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빨라 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평지길, 곧게 난 길을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브엘세바 지역의 광야에서 900미터 1000미터를 오르내리는 헤브론 산지, 예루살렘 산지, 베냐민 산지 등의 산지길을 따라, 산지와 평지, 들판과 돌짝밭을 오르내리면서, 낯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속도를 전혀 낼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다. 게다가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서, 자동차로 곧장 달려가도 반나절은 족히 잡아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 길을 반나절만에 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또한 성경 본문 속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A 목사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 성경 속 무대는 광야, 평지 평야, 해안, 산지, 강과 계곡이 이어지는 공간이다(그리심산과 세겜 그리고 에발산).

 

“이런 문화적 배경을 기억하면서, 성경의 내용을 한 번 살펴봅시다. 에서의 직업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냥꾼’(창 25:27)이었습니다. 당시는 철기 문화가 아니라 석기 문화 시대였으므로, 사냥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돌도끼 같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냥꾼이 사나운 맹수를 사냥하려면 그 맹수와 거의 육탄전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A 목사는 이 본문 속 이삭의 시대를 언제로 규정하고 있는지 불분명합니다. 또한, 그가 어느 문명권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도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 모두에 있어서,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천 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경우는 청동기 문명이 기원전 3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집트의 경우는 기원전 3,1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리, 청동은 물론 금과 은도 아주 정교하게 다루던 문명을 이미 누리고 구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의 선진 기술과 그 결과물은 아무나 누릴 수 없었겠지만, 이삭이 갖고 있던 사회적,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면, 에서나 그 가족들이 청동기 문명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 성경 속 이야기를 느끼려면, 그 시대 배경과 문명,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이집트 박물관).

 

다시 생각하기

 

이스라엘을 광야로 생각하면서, 그곳에 강과 산, 숲도 제대로 없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미국 땅에 카우보이 나오는 그런 광야만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인터넷만 활용해도 금새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잔잔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말하는 이나 듣는 이, 글을 쓴 이나 읽는 이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시대 배경을 소홀히해서 그리고 지리적 상황을 무시해서 벌어지는 성경 읽기, 설교의 오해와 같은 경우는 자주 벌어집니다. 성경 이야기를 대할 때는, 이것이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어디에서 벌어진 이야기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성경 지도라고 곁에 두고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경 속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 문명을 다룬 자료를 보면서, 그 시대의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에 대해 이미지를 보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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