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염소를 아주 호색한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염소라는 동물의 기본 성질이 다른 수컷이 자신의 암컷에게 접근하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동지역의 남자들은 이러한 염소의 성질을 보고서 수치스러운 남편에 비유했다. 남자란 아내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동지역의 남자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염소는 수치와 죄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헬라 여신들 중 비너스가 염소에 비유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고대 근동 문화에 여자들이 어떻게 비춰졌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일반적인 여성의 성질이란 호색적이고 규칙도 법도 없이 제멋대로 여서 다룰 수 없고, 언제나 정해진 뜻이 없고 늘 방황하며, 믿을 수 없고, 집안의 다른 식구들과의 관계성이 약해서 마치 염소와 같은 그런 것이었다. 또한 전체 가족의 명예를 침범당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부류가 바로 여자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는데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그리고 시집가서는 남편의 보호 아래, 아들이 장성하게 되면 아들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염소=여자=수치=죄=왼쪽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레 4:23-24).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숫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민 28:15).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사용되는 제물들은 그 제사의 성격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아기를 낳은 여인들이 드리는 제물은 순결을 상징하는 어린양이나 비둘기였고, 번제나 화목제로 드리는 제물은 숫양이었다(레 23:12, 18, 19). 그리고 제사법에서 속죄제나 기타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제물로 언급되는 동물로는 단연 염소가 가장 많다. 염소를 화목제나 번제, 또는 순결을 상징하는 제물로 드릴 수는 없었다. 문둥병의 정결케 됨을 인하여 드리는 정결예식의 제물로도 염소는 합당하지 않았다. 염소는 모든 수치와 죄와 허물을 상징하는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 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9~10). 대속죄일에 속죄제의 제물로 염소를 사용했다. 대속죄일의 행사 가운데 대속을 위해서 두 마리의 염소가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왔고, 그중 한 마리는 죽어서 피를 받아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졌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지만 분명히 대속제물은 염소였다. 이 본문에는 당시의 관용어가 숨어 있다. 당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들, 예를 들어서, 황소, 염소, 숫염소, 양, 숫양, 비둘기 등 모든 제물을 표현할 때 한마디로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즉 본문에서‘어린 양’이라는 표현 은 실제적인‘어린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을 통칭하여 언급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분은 완벽한 대속 제물이셨다.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창 27:9).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창 27:16). 야곱이 이삭을 속이고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다. 고대의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 본문을 본다면 야곱은 결코 남성답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남성으로 상징되는 털이 없이 매끈매끈한 사람이었으며(창 27:11, 16), 항상 여성들이 거주하는 장막에 거했다(창 25:27). 그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더럽힘을 당했을 때도 야곱은 근동지역 남성들처럼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 나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예를 회복하려고 시도한 시므온과 레위에게 한탄섞인 걱정을 쏟아냈다(창 34:30). 흥미로운 것은 그런 야곱과 연결되는 짐승은‘양’보다는‘염소’였다는 것이다. 그는 염소를 잡아서 이삭에게 바쳤다. 또 염소의 털로써 자신을 위장했다.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야곱의 남자답지 못한 수치스러움이었다.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한데 섞어 놓았을까? 그리고 왜 마지막에는 분리를 할까? 고대 중동지역에는 양을 치는 훈련된 개(shepherd)가 없었다. 목자들의 입장에서 양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데 양들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양 무리 가운데 염소를 3분의 1의 비율로 섞어 놓으면 양들이 염소를 따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염소라도 되는 듯이 험한 길도 아무 무리 없이 잘 가고, 초장의 풀을 먹을 때도 예전처럼 뿌리까지 통째로 먹어서 초장을 망가뜨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목자들이 의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쉽게 양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녁에 잠을 잘 때나 우리에 집어넣을 때는 양과 염소를 분리하게 되어 있었다. 양과 염소는 같은 종류의 짐승이 아니어서 교배를 통해 다른 종을 생산할 수 없는 것이 율법이었다. 또한 양은 자신의 암컷과 무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싸우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우리에 양과 염소를 같이 넣어 놓으면 숫양은 자신의 암컷과 무리를 지키기 위해서 밤새 싸움을 할 것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양과 염소 모두 소중한 짐승들이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양을 치는 것이었다. 단지 양을 치기 위해서 무리 가운데 염소를 섞는 것이지만, 하루 일과가 다 끝나면 염소의 일은 끝났다. 목자의 원래 목표는 양을 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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